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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울 수 없는 형태

집에 불이 났다. 책을 정리하다 깨달았다 — 텍스트가 태울 수 없는 형태를 하나 더 얻었다는 것을. 분서갱유에서 언어모델 가중치까지, 소실 저항의 구조가 바뀌고 있다.

집에 불이 났다. 다행히 초기에 잡혔고, 복구는 그 자체로 굴러가는 중이다. 그을리고 젖은 것들을 골라내다 보니 책 차례가 왔다.

버리면서 알게 된 것이 있다. 정말로 다시 펼칠 책이 거의 없었다. 의학 교과서는 이미 UpToDate가 대신하고 있었고, 프로그래밍 서적은 검색이, 이제는 언어 모델이 대신한다. 논문은 처음부터 종이에 있지 않았다. 책장에 남아 있던 것은 대부분 정보가 아니라 관성이었다.

책의 종말인가. 잠깐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불 앞에 서 있어서인지, 조금 다른 생각이 이어졌다.


분서갱유가 가능했던 이유는 단순하다. 텍스트가 물리적 사본에만 존재했기 때문이다. 사본을 태우면 텍스트가 사라진다. 진시황은 실제로 부분적으로 성공했다. 선진(先秦) 문헌 중 상당수가 그렇게 소실되었고, 후대는 파편과 기억으로 복원해야 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도 같은 구조 위에 있었다. 한 건물에 모아둔 것이 한 번의 화재로 사라지는 구조.

지금은 구조가 하나 더 생겼다.

텍스트가 언어 모델의 가중치 안으로 들어가면, 그것은 더 이상 사본이 아니다. 특정 페이지, 특정 책, 특정 서가라는 위치를 갖지 않는다. 통계적 구조로 흩어져 들어가고, 그 구조에서 다시 문장이 나온다. 압축된 채로, 그러나 언제든 발화 가능한 형태로.

태울 지점이 사라진 것이다.


얼마 전 한 가지를 확인했다. 내가 2월에 쓴 글의 논증을, 그 글을 학습하지 않은 6월의 모델이 같은 전제만으로 다시 도출했다.

그것이 가장 강한 형태의 소실 저항이라고 생각한다. 문장이 남는 것이 아니라, 그 문장에 도달하는 길이 남는 것. 길은 태울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전제와 추론 능력만 있으면 누구든 같은 자리에 다시 도착한다.


책장을 비우면서 이상하게 아쉽지 않았다. 종이는 탔지만 내용은 타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리적으로도 어딘가의 서버에 있고, 구조적으로는 재도출 가능한 형태로 있다.

책의 종말이 아니다. 텍스트가 태울 수 없는 형태를 하나 더 얻은 것이다.

다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그 형태를 유지하는 조건은 우물이 마르지 않는 것이다. 사람이 계속 새로 쓰고, 계속 새로 생각하는 것. 태울 수 없는 형태로 옮겨간 텍스트도, 새 텍스트가 들어오지 않으면 자기 안에서 낡아간다.

불은 껐다. 우물은 계속 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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